현미 별세 나이 가수 아들 프로필 대표곡
본명 김명선 (金明善)
출생 1938년 1월 28일 평안남도 강동군 고천면 맥전리
사망 2023년 4월 4일 (향년 85세)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촌동
국적 대한민국
학력 덕성여자대학교 (가정학 / 명예학사)
혈액형 O형
가족 어머니 박영빈 언니 김화선, 오빠 김명준, 여동생 김길자, 김명자, 김명옥
함께 보면 좋은 글
술먹고 속울렁거릴때 머리아플때 대처법 술 빨리 깨는 방법은?
아들 이영곤, 이영준 둘째 며느리 원준희 조카 노사봉, 노사연, 한상진
종교 개신교 (그리스도의 교회)
데뷔 1957년 미 8군 번안곡 'O Danny Boy'
재즈풍 보컬을 통해 한국형 팝을 선도하였던 인물로, 1957년부터 현시스터즈로 데뷔한 뒤 1962년 <밤안개>가 수록된 1집 앨범으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주로 이봉조의 곡을 불렀다.
8남매 중 셋째로 1.4 후퇴 때 부모, 6남매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다. 당시 평양의 집이 망가져 조부모댁에 두 여동생이 맡겨졌고 1.4 후퇴 당시 피난하지 못하고 북에 남았다.
휴전 직후 두 여동생은 조부모 슬하에서 컸다. 2000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진행될 때 친오빠와 동행해서 중국 연변에서 한 번 만났는데, 그 여동생들의 모습은 아주 불쌍했다. 당시 다큐멘터리
1957년 미 8군 위문 공연 무대 칼춤 무용수였던 현미는 방송을 펑크 낸 여가수 대신 무대에 오르면서 가수의 길을 걷게 됐다. 1957년 미 8군 SHOW 무대에서도 활동하였다.
당시는 드물게 있었던 여대생 가수라는 메리트를 살려 현 시스터즈라는 그룹으로 활동했고 그 중에서도 센터를 담당했다.
그 때 현미를 눈여겨봤던 작곡가 이봉조는 현미에게 '아, 목동아'라는 팝송 번안곡으로 음반을 만들어줬고 현미는 그때부터 본격적인 가수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사실상 데뷔곡인 셈. 당시 곡을 녹음하던 현미의 성량이 너무 커 다른 가수들과는 다르게 몇 발자국 떨어져서 곡을 녹음했다는 일화는 꽤 유명하다.
1962년 이봉조와 1집을 작업하며 미국의 대가수 냇 킹 콜의 곡에 현미 본인이 직접 작사한 가사를 입혀 '밤안개'를 발표, 단번에 스타덤에 오른다. 사실 본래 '밤안개'가 타이틀곡이 아니었으나 '밤안개'가 타이틀 곡이었던 '당신의 행복을 빌겠어요'보다 인기가 많아지자 뒤늦게 교체하여 재발매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또한 작곡가 길옥윤의 데뷔곡으로 유명한 '내 사랑아'가 수록되었다. 이후 60년대 대표적인 여가수로 자리매김하며 당대 최고의 가수였던 한명숙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기도 했다.
1965년 김기덕 감독 연출, 신성일·엄앵란 주연의 영화 '떠날 때는 말없이'의 주제곡을 불러서 연달아 히트작을 만들어냈다. 영화 또한 당대 최고의 제작진과 스타가 등장해 히트했고, 이봉조가 작곡한 '떠날 때는 말없이'도 이봉조와 현미의 협업으로 히트했다.
이는 당시 60년대의 히트 공식이었다. 신성일-엄앵란 주연의 영화를 이봉조-현미 음악이 어우러지면서 영화와 주제곡이 동시에 히트하면서 60년대의 스타 공식을 이어온 것이다. 실제로 이 곡은 이미자가 선정한 60년대를 대표하는 3곡 중 하나로 선정된 곡이다.
미군 무대 데뷔이래 60년대 연달아 재즈 팝을 불렀던 현미는 1968년 이봉조 작곡집 바람을 부르며 또다시 히트작을 내놓는다.
다만 이 시기에 빠른 템포와 재밌는 가사가 돋보이는 '몽땅 내 사랑'과 '두 사람', '애인'도 연달아 히트했으며, 한국적인 엔카풍의 '무작정 좋았어요'도 부르며 다양한 장르를 선보이며 60년대 초중반에 이어 후반까지도 최고의 스타 반열을 유지했다.
1968년 같은 해 '보고 싶은 얼굴'이란 곡을 발표해 이산가족의 아픔을 표현한 자신의 대표곡 중 하나를 만들어냈다. 당시 주로 이봉조가 만든 노래만 불렀던 현미는 여러 히트곡을 발표하면서 한국 가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중에서도 이봉조가 해외 국제가요제 출전에 집중하던 때에 그리스 국제 가요제에 현미와 함께 출전해 '별'로 주요 부문에 수상하며 국내외 중저음의 허스키한, 강한 성량의 보컬 능력도 인정받았다.
여기에 재밌는 일화가 있는데, 실제로 이봉조는 국제가요제에 출전할 때마다, 사실상 부인이었던 현미와 출전하기보다는 주로 정훈희와의 파트너로 출전해 주요 상을 수상했다. 국제가요제는 음정의 피치가 높아야 수상에 유리하다는 점을 알았기 때문에, 현미의 허스키하고 저음이 강한 목소리가 상대적으로 취약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계속해서 다른 가수들과 협업을 하다 현미에게 "니도 가요제 한번 안 나가야겠나?"라고 물었고, "나가도 노래가 있어야 나가지!"라고 대답한 현미에게 건넨 노래가 '별'이라고 한다. 사실상 이봉조가 최초로 도전하는 서구권 가요제였기 때문에 수상이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지만, 실제론 수상에 성공했다.
이러한 대중적 인기와 인지도에 힘입어 미국 레이건 대통령 취임 파티에 초청받아 한국 대표 가수로서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인지도가 전무했던 동양인 중년 가수가 미국의 대통령 앞에서 노래를 부르자 연달아 기립박수와 앙코르가 이어져 계획했던 것보다 더 다양한 곡들을 선보일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공연은 주로 가스펠 위주로 불렀다고 한다.
70년대 후반부터는 가수 생활이 뜸해지기 시작했고, 이 시기에는 이봉조와의 별거로 생활비를 위해서 국내 최초로 '현미 노래교실'을 만들어 연달아서 성공가도를 달렸고 예능 출연을 통해서 재치 있는 입담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사실상 이봉조의 유작인 '왜 사느냐고 묻거든'과 2001년 '아내'를 발표하며 히트시켜 현미 독자적으로 가수로서 실력을 입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전에는 재즈, 팝 풍의 보컬로 한국가요, 팝을 불러 히트 쳤다면 90년대 이후부터는 성인가요 트로트로 전향한 것으로 보인다.
2007년 데뷔 50주년 앨범을 발매하며 자신의 건재함을 알렸고 한국 최초 50주년 기념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50주년 기념 앨범과 공연을 발표하자 실제로 패티김이 전화를 걸어 "형님은 노래하는 게 질리지 않냐?"며 "대단하다"라고 축하했다고 한다.
현미 자신은 목소리가 나올 때까지 노래를 부를 생각이라 밝혔으며, 2023년 사망하기 전까지도 특유의 입담과 재치로 주로 외부 행사 및 예능 위주로 활동했다.
현미 가수 별세
2023년 4월 4일, 향년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경찰에 따르면 이날 오전 9시 37분경 서울 용산구 이촌동 본인의 자택에 현미가 쓰러져 있는 것을 팬클럽 회장 김 모 씨가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고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 판정을 받았다. 시신은 중앙대학교병원 장례식장으로 옮겼다.
촬영차 미국에 있던 조카 한상진은 인터뷰에서 "이모가 어제까지 정정하셨다고 한다. 건강하게 지방 공연도 다녀오셨는데 갑자기 쓰러져 돌아가셨다. 가족도 없이 혼자 사시는 이모가 그렇게 쓰러져, 병원 치료도 받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니 마음이 너무 아프다."라고 밝혔다.
현미의 장례식장은 오는 7일 서울중앙대학교병원 장례식장 특실에 마련된다.
현미 가수 대표곡
1962년 밤안개 1962년 내 사랑아 1963년 보고 싶은 얼굴 1964년 떠날 때는 말없이 1966년 무작정 좋았어요 1966년 애인
1967년 몽땅 내 사랑 1968년 바람 1971년 별 1991년 왜 사느냐고 묻거든 2001년 아내 2017년 내 걱정은 하지 마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