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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버 왕조 왕가 영국 대영제국의 전성기

by 네임네 2023.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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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버 왕조 왕가 영국 대영제국의 전성기

독일에 뿌리를 둔 하노버 왕가는 1714년 조지 1세부터 1901년 빅토리아 여왕의 서거까지 187년 동안 대영국과 아일랜드(1801년 이후), 인도를 직접 통치했고, 대영제국의 이름으로 확장 일로에 있던 세계 전역의 식민 영토를 직간접적으로 통제했다.

200년 가까운 하노버 왕조의 통치기는 영 제국의 전성기와 맞물린다. 이 시기 영국의 의회 정치는 통치 권력의 핵심 역할을 수행한 반면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영국 왕실의 정치적 선택이 점차 현대 입헌군주국의 전통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대영국 하노버 왕조의 문장 The House of Hanover

시기 1714년 ~ 1901년

시대 전반기-하노버 시대, 후반기-빅토리아 시대

지역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서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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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버 왕가는 독일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1714년 이후 영국 하노버 왕가의 국왕은 독일 하노버 공국의 제후를 겸했다. 1814년 하노버 공국이 왕국 체제로 격상된 이후 하노버 가문은 영국과 독일의 통합 왕가가 되었다.

한편 신성로마제국의 왕위계승법에 따라 독일 하노버의 왕권은 오직 남손에게 승계되었기 때문에 1837년 하노버 왕조 5대 국왕인 윌리엄 4세가 서거한 후 영국 하노버의 왕위는 여 조카인 빅토리아 여왕으로 이어졌다. 하노버 왕가의 독일 쪽 왕관은 빅토리아 여왕의 삼촌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조지 3세의 5남)가 물려받았다. 이때부터 영국과 독일의 하노버 왕가는 공동 왕위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왕위승계가 이어졌다. 영국의 하노버 왕조는 187년 동안 6명의 통치 군주를 배출했다.

영국의 왕위에 오른 독일계 선제후

스튜어트 왕조에 이어 1714년 영국의 하노버 왕조를 열게 된 조지 1세는 1689년부터 부친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뒤를 이어 독일 중북부 일대를 차지하고 있던 하노버 공국의 선제후1)로서 통치하고 있었다.

하노버의 선제후 조지 1세가 대영국의 왕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모친 소피아 스튜어트로부터 이어진 혈통 때문이다. 조지 1세는 스튜어트 왕가의 통합 시조인 제임스 1세의 외증손자다. 제임스 1세의 외손녀 소피아 스튜어트가 1658년 하노버의 선제후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와 결혼해서 얻은 장남이 조지 1세다.

하노버-왕조

1714년 대영국의 국왕으로 즉위한 조지 1세

1688년 제임스 2세 폐위 후 1714년 스튜어트의 마지막 군주 앤 여왕이 서거할 때까지는 정치적 과도기이자 의회권이 확대되던 시기였다.

의회는 ‘왕위계승법’(1701)과 ‘왕위보장법’(1704)을 연이어 통과시켜 이후 영국의 왕위가 오로지 프로테스탄트에게 승계되도록 못 박았다.

가톨릭계 왕권이 완전히 배제됨으로써 과거처럼 통치권자의 종교 문제로 인해 국가적 비상사태를 겪을 일은 없어졌다.

2)이 ‘왕위계승법’은 앤 여왕이 자식 없이 사망할 경우 대영국의 왕권은 하노버 공국 선제후의 부인이자 제임스 1세의 외손녀인 소피아와 그녀가 낳은 프로테스탄트 자녀들이 왕위를 잇도록 명시하고 있다.

이로써 소피아 스튜어트는 1701년 71세에 영국의 왕위후계 서열 1위가 되었다. 영국 왕위 승계 서열 2위에 있던 하노버의 선제후 조지는 1714년 5월 모친의 죽음으로 후계 서열 1위에 오르더니, 모친에 이어 2달 만에 영국 왕실의 앤 여왕이 사망하자 곧바로 대영국의 국왕 조지 1세로 등극하였다.

1714년 10월 20일,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조지 1세의 희끗희끗한 머리 위에 대영국의 왕관이 얹어지면서 대영국의 왕권은 프로테스탄트 독일계 하노버 왕가로 넘어갔다.

하노버 왕가의 긴 통치기

영국 하노버 왕조는 187년의 긴 시간 동안 안정적으로 왕권을 이어왔다. 조지 1세와 2세의 왕조 초반은 국내에서의 정치적 기반이 여전히 불안정했으나 1760년 3대 국왕 조지 3세부터는 영국 본토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왕손들이었으므로 ‘독일에서 이식된 왕실’이라는 딱지를 떨쳐낼 수 있었다.

조지 3세는 정치권에서 왕실의 권위를 재정립하려 노력했고, 한편으론 해양과 식민지에서의 패권 경쟁에서 주도권을 쥐고 싶어 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면서 18세기의 치열했던 유럽 전쟁도 일단락되고, 오랜 전쟁의 승리와 더불어 영국은 명실상부 새로운 해양 시대의 선두로 발돋움하였다.

이 기반 위에 하노버 왕조의 중후반기, 즉 19세기 영국은 세계 곳곳을 지배하는 제국으로 확장할 수 있었다. 하노버 왕조의 후반기는 1837년 즉위한 빅토리아 여왕의 통치 시기와 맞물린다. 64년에 걸친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 기는 ‘빅토리아 시대’로 통칭되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던 대영제국의 최전성기를 누렸고 더불어 쇠락의 시기를 함께 경험하였다.

조지 1세와 2세 - 불안정한 통치 전반기

하노버 왕가의 통치 전반기, 즉 조지 1세와 조지 2세의 재위 기간은 정치적으로 불안정했다. 조지 1세는 51세에 갑작스레 영국의 왕이 되었지만, 이전까지 독일을 벗어나지 않았고 영어에 무지했기 때문에 국민 대다수에게 낯설고 호감가지 않는 인물이었다.

일각에서는 대륙의 낯선 공국 하노버 쪽보다는 폐위된 제임스 2세의 아들과 손자로 이어지는 스튜어트 왕가의 남손이 영국 왕권의 적통이라 여겼다. 이를 주장하는 대표 세력으로 ‘재커바이트’를 들 수 있다. 하노버 왕조가 들어선 이후 스코틀랜드에서 두 차례의 대규모 재커바이트 저항이 있었다(1714년과 1745년).

특히 1745년, 영국을 포함해 유럽 각국이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에 집중하던 사이 폐위된 제임스 2세의 맏손자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는 스튜어트 왕가의 부활을 노리며 에든버러를 접수하고 파죽지세로 더비까지 진출하여 런던과 남부 지역을 한순간에 패닉 상태에 빠트렸다.

하노버 왕조까지 이어진 재커바이트의 저항은 1746년 컬로든 전투의 참패로 막을 내렸다. 이후 스코틀랜드 곳곳에서 재커바이트 동조 세력에 대한 정부군의 무자비한 학살이 이어졌다. 이로써 튜더 시대 이후 꺼지지 않는 정치 갈등의 불씨였던 종교 문제는 하노버 시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안정되기 시작했다.

하노버 왕가의 영토정책

1) 18세기, 세력 확장 전쟁

하노버 왕조가 들어선 18세기 내내, 유럽 패권국 간에는 세계 전역에서 세력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하노버 왕가의 통치 전반기에 해당하는 18세기 동안 영국은 유럽 본토와 해외 식민지 전쟁에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서 확고한 우위를 차지하였다.

1740년 이후 유럽 본토는 이른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1740~1748)으로 유럽 거의 모든 나라가 세계전쟁 급의 패권 경쟁에 돌입했다.

당시 하노버 왕조(당시 조지 2세)의 영국은 네덜란드와 함께 마리아 테레지아 측을 지지했다. 조지 2세는 일종의 ‘다국적’ 군대를 통솔하며 바바리아 전장에 나섰고, 이로써 대외 전쟁에 직접 참전한 마지막 영국 국왕으로 기록되었다.

1748년 프로이센이 요구한 영토를 내주는 대가로 마리아 테레지아는 왕위승계를 인정받고 전쟁은 마무리되었으나 그 불씨는 6년 뒤 ‘7년 전쟁’으로 재점화되어 유럽은 또 다시 거대한 전쟁터가 되었다.

18세기 중반부터 유럽과 신대륙 식민지의 패권 경쟁에서 영국의 주요 상대는 프랑스였다. 1751년경 인도의 동쪽 벵골 지역에서 양국의 동인도 회사들 간에 무역 긴장이 증폭되다가, 1757년 ‘플라시 전투’로 알려진 영국군과 프랑스, 벵골 연합군의 싸움에서 영국이 승리를 거뒀다.

이로써 산업과 자원의 요충지인 벵골 만 지역이 영국의 관할이 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이후 인도 전역으로 뻗친 영국의 식민 침탈이 본격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다.

조지 2세의 말년에는 신대륙 북중미의 영토 경계선을 놓고 영국, 프랑스, 스페인 간에 갈등이 첨예해졌다. 1750년대 중반 또다시 전쟁터로 변한 유럽의 ‘7년 전쟁’은 유럽의 본토뿐만 아니라 북미와 아시아까지 확산되어 식민지 대리전쟁 양상을 보였다.

이 전쟁에서 현재 캐나다의 퀘벡 지역에 진출한 프랑스군과 인디언들이 연합했고, 영국군과 당시 영국의 북미 13개 식민지가 합세했다. 1759년 9월, 제임스 울프 장군이 프랑스군의 철옹성이던 퀘벡 성을 접수함으로써 북미 대륙에서 영국의 우위를 확보했다.

1760년 33년 동안 재위했던 조지 2세의 뒤를 이어 조지 3세가 즉위한 후 유럽의 ‘7년 전쟁’이 파리 강화조약(1763년)으로 끝나면서 식민지 전쟁도 함께 종결되었다. 이로써 프랑스가 보유하고 있던 북미 지역의 상당 부분의 영토가 승전국 영국으로 이양되었다.

그러나 당시 영국은 ‘7년 전쟁’을 치르느라 국고가 바닥났고 한편으론 전리품으로 늘어난 북미 영토를 관리해야 하는 등 재정적 난관에 부딪혔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영국 의회는 북미 13개 식민지, 즉 미국 쪽에 1765년 ‘인지세’를 비롯해서 갖가지 명목의 과세를 대폭 늘려나갔다.

당시까지도 북미 이주 사회는 영국 정부와 국왕에 충성을 다해왔다. ‘7년 전쟁’에서도 식민지군은 영국군의 지휘에 따라 전쟁에 헌신하며 승리를 견인해 냈다. 그럼에도 여전히 북미 13주는 본국 의회에 대표도 보내지 못하는 상황이라, 이런 ‘2등 신민’의 지위에 대해 불만이 제기되곤 했다.

본국의 재정비용을 떠넘기고자 대표도 없는 영국 의회에서 멋대로 세금을 강제 징수하는 사태에 이르자 북미 13주 내부에서는 자치권이냐 독립이냐를 두고 팽팽한 논란과 대립이 격화되었다.

1773년 보스턴 항에서 벌어진 ‘차 사건’(Boston Tea Party)을 기점으로 독립파 쪽으로 추가 기울기 시작했고, 1775년 ‘렉싱턴’에서의 총성과 더불어 미국과 영국은 전쟁에 돌입했다. 영국 출신으로 북미에 이주해 있던 자유주의자 토마스 페인의 『상식』은 13개 식민지 전역에서 독립의 의지를 끓어오르게 했다. 이 때문에 당시 영국 귀족들은 구두 안창에 페인의 초상화를 넣고 짓밟고 다녔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1776년 7월 4일, 필라델피아의 대륙회의는 북미 13주의 독립을 자체 선포했다. 이후 5년 동안 길고 지루한 국지 전투가 이어졌는데 전쟁의 향방은 양측 모두 점치기 어려웠다.

프랑스 측이 해군력으로 북미 측을 지원하며 전쟁에 가세했고, 이후 1781년 미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요크타운 전투에서 승리하며 미국은 결정적인 승기를 잡았다. 당시 영국의 조지 3세는 독립 불가 의사를 끝까지 고집했으나, 결국 1783년 파리 강화조약과 함께 미국은 영국 왕정에서 벗어나 합중국으로 정식 독립했다. 조지 3세를 보필했던 영국 수상 노스 경은 전쟁 결과에 대한 책임을 떠안고 사퇴했다.

당시 북미 식민지 13주에서 벌어진 독립전쟁에 자극받은 아일랜드에서도 독립 움직임이 거세졌다. 이를 가라앉히기 위해 영국은 1782년 아일랜드에 자치 의회를 승인했지만, 결국 8년 뒤 조인된 '합병법'에 의해 아일랜드 의회는 영국 의회에 통합됨으로써 아일랜드는 대영제국의 일부로 정식 합병되었다. 이제 영국의 공식 국체는 ‘대영국과 아일랜드 통합 왕국’이 되었다. 스튜어트 왕가의 마지막 군주 앤 여왕이 1707년 스코틀랜드와의 합병을 성사시킨 지 1세기 만에 하노버 왕가의 조지 3세는 대영국에 아일랜드를 정식 편입시킨 것이다. 3)

합병 이후 아일랜드의 상황은 영국의 다른 해외 식민지보다 나을 바 없었다. 아일랜드는 급증하는 영국 본토에 식량을 공급하는 곡물 창고 역할을 했다. 아일랜드의 기후와 토양에서 감자는 유일하게 작황이 좋은 작물이었고 아일랜드 전역은 ‘영국의 감자밭’으로 변했다.

1845~1849년 아일랜드 감자 대기근의 피해가 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데에는 여러 원인이 있지만, 감자 외의 다른 대체 식량이 없었던 점도 피해를 키운 중요 요인으로 작용했다. 여기에 더해 영국 정부는 제대로 된 구호 정책을 전혀 시행하지 않았다. 당시 아일랜드의 800만 인구 중 150만 명이 사망하였으며, 굶주린 100만 명 이상의 아일랜드인들이 대서양 뱃길에 몸을 싣고 미국 땅으로 향하면서 아일랜드인들의 고달픈 미국 이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당시 신구 대륙의 수많은 자유사상가들은 토마스 제퍼슨의 미국 독립선언문에 담긴 천부인권과 인간존중, 공화주의의 가치에 고취되었다.

1789년 민중봉기 이후 프랑스에 혁명정부가 들어서자 영국은 오스트리아, 스페인, 프로이센 등 유럽의 왕정 국가들과 거대한 반(反) 공화주의 동맹을 맺고 10년 가까이 프랑스와 교전 상황을 거듭하였다. 조지 3세의 영국은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쟁으로 정말 실각하는 1815년까지, 즉 18세기말에서 19세기로 넘어서는 20년 동안 대 프랑스 전쟁을 치른 셈이다.

2) 19세기, 해가 지지 않는 식민 제국

1769년 제임스 쿡 선장이 태평양 첫 항해에 나서 1770년 호주 동부 해안에 첫 발을 내디뎠다. 이후 급진 개혁파에 속한 노동자와 노동운동가 다수가 일종의 ‘사상범’으로 호주에 유배되었고, 이들에 의해 불모의 신대륙 호주에 첫 식민 사업이 진행되었다(1788년). 1840년에는 뉴질랜드 섬에도 첫 식민지 정착촌이 들어섰다. 1830~50년대 다시 아시아 해역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영국은 1839~1842년에 중국에서 세계 전쟁사의 추악한 사례로 기록된 아편전쟁(1차)을 일으켰고 결국 홍콩을 차지하였다.

1850년대 크림 반도의 전쟁에 가담했고(1854~1856년), 1857~1858년에는 인도의 독립 항쟁, 일명 세포이 항쟁을 진압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제국 확장에 은근히 관심이 컸지만 1861년 부군 앨버트 공이 티푸스로 갑자기 사망하자 이후로 국사를 등한시하고 긴 애도의 칩거 상태에 들어갔다. 42세에 맞은 남편의 사망은 여왕의 개인 삶에서 압도적인 사건이었다.

여왕은 앨버트 공의 조각상과 초상, 그의 유품 등에 둘러싸여 윈저 궁에서 출타하지 않았다. 이후 40년 동안 검은 상복을 고수했고, 심지어 앨버트 공 서거 2년 뒤 치러진 왕세자 에드워드의 결혼식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빅토리아 여왕은 장녀 빅토리아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고 에드워드는 늘 누나의 그늘에 가려 성장했다. 여왕은 왕위를 승계하는 말년까지도 왕세자에 대한 불신을 끝내 거두지 못했다고 한다.

1870년대 이후 영국의 식민지 확장은 공격적인 제국주의적 양상을 보였다. 1874년 재집권한 수상 디즈레일리는 제국주의적 정책을 공공연하게 추진했다. ‘제국의 보물, 인도로 가는 길’을 안전하게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1875년 수에즈 운하에 4백만 파운드를 급 투하하고, 결국 1883년에는 수에즈 지역을 강제 점령했다.

1876년 디즈레일리 수상은 ‘왕실 칭호법’으로 빅토리아 여왕의 왕관에 ‘인도의 여제’라는 공식 칭호 하나를 더 얹어주었다. 이는 1861년 이후 긴 애도 상태에 있던 빅토리아 여왕이 차츰 공무로 돌아오는 계기가 되었다.

1870년대를 넘어서면서 사회 비판론자들 사이에 왕실의 존립 이유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사실 19세기 중후반 왕실이 갖고 있던 국가 권력의 거의 모두는 의회와 국민에게 이양된 상태였다. 당시 티푸스를 앓던 왕세자 에드워드의 건강이 위태로워지자 일부 국민은 이를 약화된 왕실 권위의 상징처럼 받아들였고, 또 다른 대다수 영국민은 국사는 물론 자식의 건강도 외면하고 있는 빅토리아 여왕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상황을 간파한 빅토리아 여왕은 이후 1880~1890년대 왕실의 공식 석상에 좀 더 모습을 드러내어 왕실의 건재함을 보여주려고 했다.

하노버 왕가가 이끈 산업 제국의 성과와 이면

1) 인도 지배와 면직 산업의 호황

16세기 중반까지 영국의 주요 산업은 초지와 양 목축업에 기반을 둔 모직 산업이었다. 그러다 1757년 ‘플라시 전투’ 이후 인도를 사실상 지배하게 되자 면화를 바탕으로 고대부터 번성해 온 인도의 면직물 기술을 약탈적 방식으로 영국으로 흡수했다. 1767년 하그리브스가 근대 발명사의 쾌거 중 하나인 방적기를 고안해 내면서 면직물 산업은 탄력을 받았다. 여기에 1775년 이후 제임스 와트의 증기 동력과 풍부한 탄광 자원의 측면 지원이 더해지면서 18세기 후반 이후 면직물 산업은 영국의 산업혁명을 선도한 견인 산업이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막대한 해외 자본을 끌어 모은 국부의 노른자위가 되었다.

2) 곡물법과 신구 자본의 대결

1815년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자 대륙봉쇄령으로 닫혀 있던 영국의 대외 교역이 다시 활발해졌다. 그러자 영국 의회는 ‘곡물법’을 통과시켜 유럽과 신대륙에서 값싸게 수입되는 곡물로부터 자국 농산물을 보호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는 거대 경작지를 보유한 대지주들의 이해를 반영한 법안이었고, 따라서 도시 부르주아와 상공인의 반대가 거셌다. 또 저렴한 수입 농산물 대신 비싼 자국산 농산물을 소비해야 했기에 임금 노동자를 비롯해서 도시 빈민들 역시 불만이 가득했다. 게다가 기층 서민의 노동 임금 상승은 생계비 상승으로 이어져 낮은 임금을 유지하려는 공장 자본가들 또한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결국 곡물법은 1848년 사회 여러 계층의 저항에 부딪혀 폐지되고 말았다. 곡물법이 시행되고 폐지되는 과정은 17세기까지 이어져온 전근대적인 토지 자본의 사회경제적 주도권이 18세기 상공업 중심의 신흥 자본으로 넘어가는 상황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3) 런던 박람회 - ‘수정궁’에 쏘아 올린 산업 사회의 축포

1849년에는 런던 번화가에 오늘날 백화점의 효시격인 헤로드 상점이 들어섰다. 1851년에는 드디어 제1차 세계 박람회가 런던 하이드파크에 축조된 ‘수정궁’에서 개최되었다. 이는 드넓은 대영제국의 밤하늘을 환하게 장식한 불꽃 축포와 같았다. 당시 왕실, 특히 앨버트 공이 직접 이 행사에 꽤 공을 들였다. 특히 영국의 산업기술과 상품들을 전시하면서 동시에 해외에서 들여온 갖가지 물품을 전시했고, 이를 통해 영국은 선도적인 산업 제국이자 세계를 지배하는 무역시장의 종주국임을 전 세계에 과시했다.

또한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이 자녀들을 동반해 박람회를 찾는 장면이 연출되면서 제국의 권위와 가정의 미덕이 한꺼번에 효과적으로 홍보되었다. 박람회에 대한 영국민의 자긍심과 환호는 대단했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막 개통되기 시작한 기차를 타고 런던 박람회에 가는 것이 그해 영국인의 꿈이었다고 한다.

4) 산업 제국의 뒷면

산업 제국의 그늘에 가려진 산업 노동자층과 도시 빈민의 생활조건은 참담한 수준이었다. 도시 내에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하층 빈민의 수는 왕실과 귀족층은 물론 부르주아지의 안락한 생활에도 위협 요소로 작용했다. 정부는 1833년 공장법을 제정해서 9세 미만의 유아노동을 법으로 금지하고 여성 노동자와 소년 노동자의 노동 시간을 감축하도록 강제했다. 이듬해 연이어 통과시킨 구빈법에 따라 구빈원 제도를 마련해 사회 최하층에 공적 부조를 투입하였다. 그러나 19세기말까지 아동과 여성의 값싼 노동력을 활용하여 비용을 줄이려는 자본가의 탐욕은 지속되었다.

1836년 출판된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를 보면 이 구빈원과 구빈정책의 실상이 서민 삶의 희로애락을 담은 재치 있는 묘사와 생생한 유머를 통해 풍자되고 있다. 제국의 식민지에서 유입된 이주민과 최하층 서민이 뒤섞여 지내는 도시 빈민가의 주거 환경은 유럽의 마지막 흑사병이 창궐했던 17세기 중반과 비교될 정도로 열악했고, 오염된 식수로 인한 콜레라 질환은 독감만큼이나 흔했다.

하노버 왕가의 문화적 성과

1810년 조지 3세의 의문스러운 광증이 재발하자 왕세자 조지가 1811년부터 섭정을 맡았고, 1820년 조지 4세로 정식 즉위했다. 조지 4세는 부친 조지 3세의 긴 재위기 동안 다소 방종한 왕세자였지만 지적인 면이나 예술적 안목이 남다르긴 했다. 섭정 기간 중 나폴레옹 전쟁이 영국의 승리로 끝나면서 18세기를 휘몰아친 유럽의 패권 전쟁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이로써 그의 재위 기는 나라 안팎에서 모처럼의 평화를 이어갔다.

조지 4세와 동생 윌리엄 4세 모두 완고한 부친 조지 3세와 늘 관계가 나빴고, 이 때문인지 두 국왕은 부친과 달리 정치적 포부를 펼치는 데 관심이 없었다. 국사는 의회권력에 맡겨진 형편이었다. 조지 4세의 경우, 의회가 ‘가톨릭 해방법’을 통과시킬 당시 이례적으로 거부의 뜻을 강하게 밝히기도 했지만, 왕실과 의회 사이의 갈등이 큰 사회적 불안으로 불거질 일은 거의 하지 않았다. 이 기간에 영국은 제조업과 교역 산업이 약진하면서 국내외 자본이 쌓여갔고, 이런 안정된 물질적 토대 위에서 문화사와 지성사를 빛낼 성과들이 마치 경쟁하듯 터져 나왔다.

혁명과 전쟁으로 뜨거웠던 1770~1790년대는 계몽주의 및 자유주의 사상가들, 경제학자들의 저작이 쏟아졌다. 이들은 미국 독립과 프랑스혁명에 정신적 자양분을 제공했고, 이는 예술 분야에서 낭만주의의 물결로 이어졌다. 윌리엄 워즈워드의 유명한 『서정시가집』(1798년)은 코울리지와 공동 집필한 『문학평전』과 더불어 영국 낭만주의의 선언적 작품이다. 소설 분야에서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1813년), 『엠마』(1815년) 등의 작품은 18세기에서 19세기로 전환되는 변화의 시대에 영국 부르주아 계층의 가치관과 생활상을 지성적인 통찰로 세밀하게 그려냈다.

하노버의 후반이라 할 빅토리아 시대는 신문, 잡지, 그리고 소설의 시대로 기록된다. 무엇보다 『올리버 트위스트』(1837년), 『두 도시 이야기』(1859년), 『위대한 유산』(1861년) 등 당시 출판된 찰스 디킨스의 대표 저작을 통해 풍요로운 산업 강국 영국민의 속사정을 확인할 수 있다. 웃고 울리는 밑바닥 인생의 애환 속에 디킨스는 인간을 보는 통찰과 사회에 대한 비판을 함께 담아냈다.

또한 전통적인 가치와 체계에 도전한 사상가들의 업적은 소설의 성취를 능가할 만하다. 그 몇 예로는 1859년 출판된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과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1867년 정치경제학의 경전인 칼 마르크스의 『자본 1권』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독일 출신 하노버 왕조의 국왕들은 대체로 음악에 애호가 깊었다. 그 시조 조지 1세는 하노버 시절부터 헨델과 가깝게 지냈고, 대영국 왕으로 즉위하면서 그를 궁정 작곡가로 초빙했다. 특히 문화예술의 전성기였던 조지 4세 시절에 왕립 음악원이 창립되었고(1823년), 같은 해 대영박물관이 대대적인 확장 사업에 들어갔다. 이듬해 1824년에는 내셔널갤러리가 개관하여 현재까지 ‘예술의 전당’으로서 대영박물관과 쌍벽을 이루고 있다.

조지 4세는 건축가 존 내쉬를 발탁해서 런던 중심에 현대적인 리전트 가와 리전트 공원(1811~1825년)을 조성하게 했고, 버킹엄 궁의 증축도 맡겼다. 현재 영국 왕실의 주궁(主宮)인 버킹엄 궁은 1762년 조지 3세가 샤를로테 왕비를 위해 구입한 왕실의 사저였고, 조지 3세 부처 14명의 자녀들이 이곳에서 출생했다. 조지 4세는 즉위 후 이곳의 개보수 작업을 추진하던 중 아예 정식 궁의 규모로 대대적으로 증축하도록 했다. 조지 4세 사후에도 윌리엄 4세까지 버킹엄 증축 사업은 이어졌고, 1837년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하면서 왕실의 정식 주궁으로 승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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